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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를 탄압한 신유박해와 한덕운 토마스

Show must go on 2017. 12. 2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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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주소서.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당신들은 이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사오니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 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주소서.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입니다.

우리나라는 유독 순교자가 많은 나라입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많은 박해가 있었거든요.

그 중에서 신유박해때의 한덕운이라는 분의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후에 복자로 시복된 분입니다.

옹기쟁이로 꾸며 무참히 살해되어 순교한 순교자들의 시신을 옹기에 담아 옮겨 장사를 지내주신 분인데요.

어떤 분인지 한 번 알아보고자 합니다.

 

한덕운 토마스(1752~1801)은 충청도 홍주 출신입니다.

1790 10월에 윤지충 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습니다.

바로 그 이듬해 윤지충은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덕운은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습니다.

 



그 후 한덕운은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성사의 은총을 받으려는 생각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려고 하였지만 끝내 그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1800 10 , 한덕운은 좀 더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 현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하였습니다.

이 곳에서 그는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기도와 독서를 부지런히 하였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만 열중하였습니다.

 

한덕운은 신자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고 권면하기를 좋아했는데, 이럴 때면 그의 말은 언제나 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합니다.



 

다음 해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덕운 토마스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보기로 작정을 하는데, 이는 교회와 교우들의 소식이 궁금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한덕운은 거적으로 덮여있는 홍낙민 바오로고의 시신을 보게 되었고, 이 때 한덕운은 놀라고 비통한 마음으로 그 시신에 애도를 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홍재영 프로타시오를 보고는 부친을 따라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엄하게 질책했습니다.

홍재영은 그 후 다시 신앙을 되찾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1839년 순교했습니다.

 



또 한덕운은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 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주기도 했습니다.

 

박해의 상황에서 신자들의 시신을 돌보아준다는 것은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한덕운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고, 여러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다른 사람들을 밀고하지 않았고, 어떤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동료들과 함께 사형판결을 받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 산성으로 옮겨져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이때가 1802 1 30(음력 1801 12 27)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습니다.

 



한덕운의 마지막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비록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어찌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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